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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성평등위원회18

이달의 성평등 영화 3월 <채민이에게> 배채연 (2020) 배채연 2019년을 마치고 2020년이 될 때에, 나의 언니는 도미니카공화국에 있었다. 도미니카공화국은 어디에 있는지, 지도를 펼쳐도 언니가 사는 곳을 짚어내려면 머뭇거리느라 시간이 갔다. 언니와 나는 긴 주기로 이따금 메일을 주고받았다. 그때 그 편지가 다시 읽고 싶어서 메일함을 뒤적거렸다. 한국에서 스무 시간의 비행으로야 닿을 수 있는 곳에서 한국보다 열세 시간 느리게 살고 있다는 말로 언니의 편지가 시작했다. 붙어 살 때는 말도 안 되게 싸워댔던 언니와 나는 스무 시간의 비행이 필요한 거리를 두고서야 서로의 언어를 궁금해했다. 엄지와 검지로 구글맵을 한참 좁히면 드러나는 직선과 점선의 경계와 좌표. 측량하고 분석하고 편집해서 만들어낸 지도상의 축척과 규격들이 과연 어떻게, 어째서 유효한.. 2023. 3. 8.
이달의 성평등 영화 2월 <순영> 박서영 순영의 얼굴을 보며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며느리, 누군가의 어머니의 얼굴 말이다. 오랜 시간 부모의 간병을 해온 순영은 장례식 이후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애도의 시간, 회복의 시간, 사회로 복귀하기 위한 준비의 시간은 없다. 순영에게 간병을 떠맡겨온 가족들은 부모의 죽음 이후, 이제는 하루빨리 순영이 제 몫을 해내길 바라며 순영의 등을 떠밀고 있기 때문이다. 순영은 알바를 구하기 위해 반찬가게에 면접을 보러 간다. 긴 시간 간병을 해온 순영에게 ‘그동안 뭐 했어요’라는 질문은 어쩐지 어렵게만 느껴진다. 직접 집에서 병수발을 해왔다는 대답을 해보지만 그동안 해온 돌봄 노동의 시간을 한 줄로 정의해 보니 어쩐지 보잘것 없이 느껴진다.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며느리, .. 2023. 2. 1.
이달의 성평등 영화 1월 <SAVE THE CAT> 허지예 📢 1월 이달의 성평등 영화는 인디스페이스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태현 님께서 추천해 주셨습니다. 영우와 진희는 작업실을 함께 쓰는 동료다. 영우는 글을 쓰고, 진희는 영화를 만든다. 둘은 함께 밥을 먹고, 요가도 하고, 서로의 작업을 응원한다. 작업실에는 빈방이 있다. ‘M의 방’. 누군가 떠난 자리. 둘은 쉽게 방문을 열지 못한다. 충분히 애도 되지 못한 슬픔이 남아있다. 어느 날, 작업실 안으로 들인 고양이가 공간을 휘젓고 다닌다. 작업실 앞에 고양이를 버리고 간 사람은 진희의 친구다. 그의 편지에는 “너라면 고양이를 버리지 않을 것 같아”라고 쓰여있다. 진희는 편지를 던져버린다. 영우와 진희는 ‘착하고 순진한 예술하는 여자’가 아니다. 그런 사람은 세상에 없다. 둘은 자기 입 밖으로 나온 말을 자주 .. 2023. 1. 4.
이달의 성평등 영화 12월 <호랑이와 소>(2019) 김승희 영화 여성에 대한 사회의 차별과 멸시를 이겨내기 위해 이빨과 손톱의 날을 세워야 했던 호랑이 띠 엄마의 삶, 열 아들 못지않은 우직한 딸이 되어야만 했던 소띠 감독의 삶이 그려진다. 영화 는 감독과 그의 어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모녀가정에 새겨진 여성에 대한 주홍글씨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영화이다. 엄마와 감독의 대화 위에 호랑이와 소의 그림이 그려진다. 역동적이게 움직이는 선은 호랑이를 위협하는 총과 칼로, 소를 움켜잡는 끈으로 변주하며 그들의 삶을 옭아맨 ‘띠’의 견고함을 보여준다. ‘아직도 이혼가정에 대해 주홍글씨가 남아있냐’ 호랑이와 소의 목소리를 지우는 편견은 끊임없이 다른 모양으로 굴곡되어 들려온다. 아직까지도 우리 안에 남아있는 편견은 무엇일까. 두려움은 무엇일까. 호랑이와 소가 걸어온 길을 .. 2022. 12. 14.
이달의 성평등 영화 11월 <방문>(2018) 명소희 떠나, 가로질러 영화 을 소개하며 나의 누나가 결혼을 한다. 그는 결혼을 하면 한국을 떠날 거라고 한다. 어쩌면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한다. 문득 명소희 감독의 영화 이 떠올랐다. 은 감독의 과거와 현재를, 춘천과 서울을 횡단하는 자전적 다큐멘터리이다. 나의 누나와 명소희 감독이 겹쳐 보이는 것 같다.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하면 영화 속 이야기가 누나의 미래처럼 보였다. 다시 돌아와 누나는 왜 이곳을 떠나려 하는 걸까. 사실은 질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말하지 않아도 이해하고 동의할 수 있다. 여성이 자신이 살아온 곳을 떠나는 선택에 대하여. 11월 첫째주에 열리는 독립영화 쇼케이스 기획전 “몸, 장소, 영화로부터 온 질문들”의 상영작으로 을 선정했다. 기존 로컬시네마 담론에 어느 정도 대항하면.. 2022. 11. 1.
이달의 성평등 영화 10월 <오마주>(2021) 신수원 지금 여기에 없는 누군가를 간절한 마음으로 좇는 일은 어떤 심정과 태도로 수행할 수 있을까. 의 지완은 한국의 두 번째 여성 감독 홍은원의 영화 를 복원하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고 사람과 장소를 수소문하며 공백을 채우고 조각을 이어붙인다. 홍은원 감독의 흔적을 살피며 지완은 잘 알고 있는 마음을 마주 본다. 여성 감독으로서 느끼는 고뇌와 불안함, 외로움. 포기해야 했던 것들과 사라지지 않는 열망들. 지완도 홍은원도 알고 있는 마음이다. 세 편의 영화를 끝으로 영화를 더 만들지 못했다는 홍은원과 흥행이 저조한 세 편의 영화 이후 전망을 가늠하기 어려운 지완은 닮아있다. 영화를 만드는 일이 몸과 마음이 헐어가는 일이라는 걸 알아도 지완은 영화 언저리에 있으려 한다. 무언가를 몹시 사랑하고 경외하기 때문에 더 .. 2022. 10. 5.